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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생이야기

2015-2 이한열장학생의 이야기, 하나
글쓴이 : 관리자 등록일 : 2017-05-31 11:23:58 조회 : 3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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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1987년 6월 9일 연세대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이한열 열사와 함께 있었습니다. 이한열 열사는 이 날 시위대를 향해 이 수평으로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약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사망했습니다. 이한열 열사 사망 후 총학생회 측에서는 혹시 있을 수도 있는 이한열 열사 사체 탈취를 방비하기 위해 긴급하게 경비조를 편성하여 세브란스 병원을 교대로 밤을 세워가며 지키게 하였고, 아빠는 경비조의 일원으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빠는 1988년 8월 15일 연세대에서 ‘남북한 학생회담 출정식’에 통일선봉대로 참가하였다가 5백 여명의 연행자 속에 포함되어, 구류 4일 판정을 받아 생애 처음으로 유치장 생활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1989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에 소속된 5백 여명의 학생들이 1989년 5월 25일, ‘이철규 열사 고문살인 진상규명 및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등을 요구하며 명동성당에서 구국대단식 농성에 돌입했을 때, 그 자리에는 엄마가 있었습니다. 농성이 장기화되면서 많은 학우들이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고 탈진해 응급조치를 받기도 했습니다. 엄마는 그 때 10일간의 단식 농성으로 폐가 터져 수술을 받았으며, 현재도 가슴 아래에 큰 흉터가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엄마가 비오는 날마다 폐가 아프다고 하시는 이유를 알지 못했고, 어린 마음에 엄마의 흉터가 징그럽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게 된 지금은 엄마의 흉터가 누구보다 자랑스럽고 대단한 일을 했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빠와 엄마는 3학년(1989년) 때, 각 대학 기독학생회 회장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4학년(1990년) 때는 한국기독학생총연맹의 회장과 서기로 대학 4학년을 온전히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저도 이제 대학생이 되어 부모님이 민주화운동을 하시던 나이가 되었고 교내 학생총회 참여 또는 집회만 참여해보았지만 이번일이 기회가 되어 조금 더 민주화에 기여할 수 있는 활동과 자원봉사에 힘쓰고 싶습니다.또한 사회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고등학교 재학 당시 좋은친구라는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었습니다. 몸또는 마음이 불편한 친구들과 함께 밥을먹고 함께 지내는 동아리활동이었습니다. 현재는 졸업하였지만 그 친구들과 연락을 지속적으로 하여 집도 방문하고 부모님과도 연락이 닿게되었고 이번 방학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곳 근처에 몸또는 마음이 불편한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모여 그 친구들이 아이클레이, 난타 등 수업을 받는 활동을 하고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방학이 되면 오전 시간에 그 곳이 빈다는 소식과 함께 자원봉사 제안을 받아 아직 저희가 가르칠 수 있는것이 많지는 않지만 다른친구들과 함께 간단히 배울 수 있는 종이접기, 찰흙, 비즈공예등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제가 기준에 부족한 학생일지 모르지만 앞으로 더 기준에 부합한 학생이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장학금을 받는 학생이 아니지만 이번기회로 부모님의 학비부담을 덜어드리고 저도 조금씩 장학금 후원을 하여 다른 친구들의 학비에 보탬이 되는 학생이 되고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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